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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오빠, 나 오빠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무기는 갑작스러운 불회의 말에 흠칫 멈춰섰다. 명교 병사들을 위무하고 한 달 만에 돌아온 명교 본거지, 불회와는 한 달 보름 만의 만남이었다. 오산인과의 식사 자리에는 뵈지 않던 불회가 제 침실 가는 길목에 선 걸 보고 반가워 한 것도 잠깐, 인사도 생략하고 ‘부탁’부터 꺼내는 불회에게서 어떤 기시감을 느꼈던 탓이다.
“불회 누이, 혹시…. 음. 일단 부탁의 내용을 이야기해 주지 않을래?”
“아, 오빠. 난처한 부탁 아니야. 이번엔 진짜루, 으응?”
이번엔 진짜루, 라니. 저번 부탁이 난처했다는 건 아는 모양이구나.
무기의 낯에 어색한 미소가 풀어지지 않는 걸 보고 불회는 안달을 했다.
“째째한 오빠,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누구나 믿어주면서 내게는 이리 인색하다니.”
“하지만 불회 누이, 이제 부녀 사이의 일에 끼어드는 건 아무리 내가 교주라고 해도 너무 월권같아. 그리고 너와 소소 사이도 잘 진전되고 있으니 이 이상은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무기는 바싹 붙어오는 불회에게 애써 선을 그었다. 무기 치고 꽤 직접적인 거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번 불회의 부탁이 무기 일생 손에 꼽는 고역이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일신상에 온갖 비극과 고난을 겪어왔고, 지금도 은원으로 얽히고설킨 강호인들 사이를 중재하느라 고생 중이지만 불회의 ‘부탁’은 무기로서는 그 어느 것보다 난제였다.
- 소소를 내 정인으로 인정 받고 싶어. 오빠가 나서서 아빠에게 먼저 운을 띄워 줘. 오빠가 하는 말이라면 아빠도 소소를 받아들여줄 거야.
곤륜산 산기슭에서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기는 그야말로 암담했다. 아니, 잠깐만, 불회 누이. 소소는 너와 같은 소녀인데. 아니, 소녀끼리 서로 애모할 수도 있지. 맞아. 애모하는 데 남녀가 어디 있겠니. 그런데 너 소소랑 만난지 얼마 안 되지 않았니. 음, 애모하는 데 시간이 그리 중요한 건 아닐 수도 있지. 그래 우리 엄마아빠도 만난지 얼마 안되었지만 빙화도에서 행복하셨으니까. 아니 그런데 불회 누이. 잠깐만, 불회 누이. 잠깐만.
- 나는 소소랑 평생 함께 하고 싶어. 평생 함께 할 사람과 못된 장난 치는 것처럼 눈치 보며 어울리기 싫단 말이야. 소소는 내게 어렸을 적 사탕 과자 같은 사람이야. 소소를 아끼고 보기만 하다 망가뜨리거나 놓치기 싫어.
불회는 일곱 살 때도 그러더니 여전히 성정이 불같고 곧았다. 이름대로 후회를 모르는 이 소녀의 열정이 너무나 뜨거워서, 어렸을 적 사탕 과자 일화가 아련한 추억을 불러 일으켜서, 무기는 결국 승낙을 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난처함이 줄어든 건 아니었다.
불회의 아버지이자 명실상부 명교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양 좌사는 가뜩이나 기민한 이로, 명교와 깊은 연고도 없던 무기를 오로지 언변으로 붙잡아 교주로 만든 사람이었다. 반면 무기는 이제 갓 스무살 된데다 세상 경험 – 특히 이러한 애정 문제에 대해서 아는 게 전무했다. 그런데 다짜고짜 이런 부탁을 받았으니, 불회의 등쌀에 떠밀리긴 했으나 그야말로 제가 입으로 말하는지 코로 말하는지도 모른 채 진전했던 것이다. 다행히 양 좌사가 더 따지지 않고 응낙했으니 망정이지, 정말 그때를 생각하면….
“소소와 혼인을 해도 좋고, 건곤대나이 익히는 걸 미뤄도 좋지만 이제 이후 이야기는 양 백부님과 직접 해도 좋을 것 같아. 불회 누이.”
“그런 일이었다면 내가 이야기 했을 거야. 이번 건 오빠의 힘이 정말 꼭 필요하단 말야.”
불회가 다시금 안달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아예 무기의 팔뚝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어이쿠, 불회 누이. 그새 건곤대나이를 열심히 익혔구나 원래도 세던 팔뚝심이 더 세졌네… 무기가 교주 체면도 잊고 휘청이는 몸을 가누는 찰나, 불회의 2차 폭격이 감행되었다.
“이번 부탁은 내가 아니라 우리 아빠에 대한 거야.”
“양 백부님?”
이건 또 뜻밖이었다. 양 좌사에 대해서, 다른 이가 저에게 상담할 일이 있다니?
양 좌사는 무기가 교주가 된 후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이였다. 명교에서 교주 다음 가는 직위인 것은 물론, 교의 실상과 할 일, 규율과 역사를 가장 잘 아는 이가 양 좌사였던 것이다. 광명정에 쳐들어온 육대문파를 흩어놓은 후 떠나려던 무기를 붙잡아 교주 자리에 앉힌 장본인이기도 하다.
불회야 한 달 보름만에 보는 것이지만 양 좌사와는 매일 아침에 만나 저녁에 헤어지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쩌다 둘 중 하나가 외부에 나가더라도 끊임없이 서신을 주고 받는 중이다. 그런데 양 좌사의 고심을 헤아리긴 커녕 어떤 고민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자신은 아직도 눈치가 없고 모자라다는 한탄이 절로 나오는 무기였다.
“백부님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니?”
“글쎄, 아빠야 항상 걱정거리가 있지. 명교가 이제 간신히 교단 답게 돌아가려 하는데. 하지만 그거야 아빠 일이잖아? 오빠가 온 이후에는 그나마 행복한 걱정거리들 뿐일걸.”
“그럼 무엇 때문에…?”
“오빠, 아빠에 대한 문제라고 해서 아빠가 걱정할 거라고만 생각하지 마. 아빠에 대한 내 걱정
일 수 있잖아.”
“그럼 불회 누이의 걱정은 뭔지….”
무기가 되물을 때마다 불회는 까딱 까딱 손짓을 했다. 그때마다 무기의 고개도 갸웃 갸웃 불회 쪽으로 기울었다. 마침내 불회와 무기의 시선이 마주 할 만큼 무기의 고개가 수그러들자, 불회는 세상 진지한 얼굴로 속삭였다.
“우리 아빠, 저러다 명교 귀신 되면 어쩌지?”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불회 누이, 아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 나는 지금 소소와 너무나 행복하지만 말이지.”
무기가 당황하든 말든, 청산유수로 말을 이어가는 불회였다. 영준한 얼굴에 수심 드리운 것이 퍽 진지해 보였다.
“내가 정인과 더불어 어울려보니 알겠어. 아빠가 얼마나 고독한 처지인지 말이야.”
“그야…. 백부님이 혼자 있는 시간이 기셨지.”
양 좌사가 불회의 어머니 기효부 - 기 고모님 외의 어떤 여인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불회 못지 않게 잘 아는 무기였다. 아마 양 좌사, 기효부, 불회 세 사람을 제외한다면 세상에서 그들의 관계 내막을 가장 잘 아는 이가 무기일 터였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기효부가 어떤 협사였고 불회를 어떻게 키웠는지 눈앞에서 본 그였다. 기효부가 진짜 의인이요, 진심으로 무기를 대해주었기에 어렸던 그도 목숨을 걸고 그녀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불회가 생전 본 적 없던 아버지 양 좌사를 무사히 만났고, 지금은 차기 교주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일곱 살 불회를 데려다준 후 장성하기까지 과정은 모르지만, 십년이 지난 후 만난 좌사를 봤을 때 그 사이 기효부와 불회를 두고 다른 사람을 가까이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예전이야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지만 지금은 달라. 교단도 안정되었고 우리 어머니를 겁박해 죽였다는 오명도 씻었잖아. 그런데도 저렇게 혼자 일만 하고 있으니, 정말 걱정이야.”
“백부님은 네가 행복한 것만으로 온 세상을 다 얻으신 기분일 거야. 불회 누이, 그런 걱정 하지 말고 건강하고 행복하기만 하면 돼.”
“아빠도 그렇게 말하지만 걱정이 되는 걸 어쩌겠어. 소소와 소풍을 나가도 문득 아빠 생각이 나면 마음껏 웃을 수가 없는걸.”
불회가 또 한숨을 폭 쉬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양 좌사가 하루 종일 교단 아니면 교주의 일, 교주 아니면 교단의 일만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불회가 어린 나이도 아니니 부친의 외로움을 걱정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마음은 알겠어. 불회 누이. 내가 뭘 하면 좋을까?”
“고마워! 무기 오빠!”
“고맙다는 인사는 네 부탁을 들어주고 나서 받을게. 그래서 어쩌면 좋을까?”
“답은 하나지. 우리 아빠와 어울리는 짝을 오빠가 찾아 주었으면 해.”
“뭐어?!”
명쾌한 답. 명쾌한, 너무 명쾌하고 뻔하지만 답은 없는 부탁이었다. 무기는 저도 모르게 손사레를 쳤다.
“마음은 알겠지만 불회 누이, 이건 네 첫 번째 부탁보다 더 어려워.”
“오빠가 어려워 하는 건 알겠지만 오빠 밖에 해줄 사람이 없는걸!”
“내가 어떤 재주가 있어도 이건 안 될 거야. 너는 이미 소소와 마음이 통했지만, 양 백부님은 스스로 가까운 사람을 만들고 싶으신 것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나서서 권할 수 있겠어.”
다른 명교 사람도 아니고 그 양 좌사에게 마음에 없는 인연을 권하고 친밀해지도록 주선하라니, 정말 하늘과 땅이 맞붙었다 떨어져도 불가능할 일이었다. 이런 부탁이라면 그 천부당 만부당함을 경서로 쓰라고 해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네 말대로 스스로 세상에 여인은 기 고모님뿐이라고 하셨다면 다른 여인과의 만남을 추진해도 소용 없을 거야.”
그러나 불회 역시 보통 각오로 온 것이 아니었다. 불회는 오히려 무기가 그렇게 말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남자여도 돼!”
“뭐… 뭐어?!?”
“세상의 짝이 여자와 남자끼리만 만나라는 법이 어디 있어. 여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도 한 짝일 수 있는 거야. 오빠 세상을 넓게 봐야지.”
“도대체 무슨 말이야. 불회 누이. 그건 정말 권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대단한 실례가 될 수도 있는 거야.”
무기가 혼백이 나가든 말든 불회는 간곡한 청을 이어나갔다.
“오빠, 나도 오빠가 무슨 말 하는지는 잘 알아. 하지만 그렇게 오래 독수공방을 해온 아빠인만큼 조건을 달면 달수록 더 좋은 사람을 구하기 힘들 거란 말야.”
“불회 누이….”
“내가 당장 내 새어머니 감을 바라는 게 아니라, 누가 되었든 아빠가 마음을 붙이고 대화도 나누고 어울려 살아갈만한 사람이기만 하면 돼. 그런 사람이라면 여자든 남자든 젊든 늙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런데 지금 내 주변에 우리 아빠에게 어울릴만한 사람을 찾아달라고 할 사람이 오빠 뿐이야. 오빠는 명교 뿐만 아니라 강호의 여러 사람을 만나는데다 아빠의 성미에 맞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사실, 교주인 오빠가 권하지 않는 한 아빠가 들은 척도 안할 것 같아서 그래.”
“불회 누이….”
“아빠에게 스스로 찾으라고 했다간 영영 소식 없다가 그대로 어머니 무덤까지 들어가 버릴 것 같단 말이야. 그럼 나는 그 후에 어떻게 하면 좋아.”
불회의 눈가에 영롱한 이슬이 한 방울 두 방울 맺혔다. 이런 모습을 어떻게 못본 척 하겠는가. 무기는 결국, 응낙을 하고야 말았다.
“알았어. 내가 ‘주변’에서 혹 좋은 짝이 될만한 분이 있나 살펴보기는 할게.”
“고마워. 고마워! 무기 오빠!”
“하지만 내 보는 눈에 영 자신이 없어서, 어떤 사람이 좋을지 너와 상의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사람이 네 마음에도 들면, 그때 백부님에게도 권해 볼게.”
“그래, 그렇게 하자. 너무 고마워 오빠, 오빠는 정말 우리 셋의 은인이야!”
불회는 너무 기쁜 나머지 무기의 팔을 잡은 채 깡충깡충 뛰었다. 땋은 머리가 나풀대며 생기가 완연했다. 무기는 반짝 반짝 빛나는 불회의 눈빛에 살풋 웃었다. 불회가 저리 기뻐하기에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 불회만 좋으면 되었지, 무기는 그렇게 결론 짓고 불회를 제 거처로 돌려보냈다. 그것이 그가 마음 편히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밤인 것을 모른 채….
광명좌사 양소의 배필, 어떤 사람이어야 하겠는가?
일단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게 좋을 것이다.
나이도 있고 연륜도 있고 식견도 있는 게 좋겠다. 특히 성정이 곧고 깨끗하되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 좋을 터이다. 맑은 물처럼 세상을 그대로 비추되 세속에 찌들지 않는 그런 사람이 좋겠다….
무기가 처음 양소의 배필감으로 그려본 사람은 이렇듯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 보름쯤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 끙끙 거리며 주변을 탐문했다.
그런데 무기가 아는 몇 안되는 사람 중 양소와 나이대가 맞는 강호 여인은 더욱 없었다. 아미파는 애초 명교와 가장 껄끄러운 사이이니 논외. 곤륜파 등에도 여걸이 없는 건 아니지만 썩 눈에 차는 이가 없었다. 무공 등은 그렇다쳐도 성품이며 관심사가 양 좌사와 함께 했을 때 잘 어울릴 것 같은 이가 없었다.
불회에게 억지로 명단을 올리고 그 중 한 두 명을 명교로 초대했으나, 엉뚱하게 불려온 이들은 양 좌사를 보는 체 마는 체 했고, 양 좌사 측에서도 교주의 손님 그 이상의 대우는 하지 않았다.
무기는 그러고도 며칠쯤 더 중년 여걸들의 이름을 되뇌어 보다 결국 제가 설정한 조건을 바꾸기로 했다. 여인들이 성에 안 차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리던 양 좌사의 배필 상이 세상을 뜬 기효부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 고모님 같은 이가 없을 바에야, 아예 다른 사람이 물망에 오르는 것은 어떨까.
그래서 이후에는 역시 연륜과 식견이 있는 호걸들을 남녀 불문하고 살펴 보았다. 특히 참고한 것은 명교 사람들이 말하는 추억 속 양정천 교주였다. 무기 본인은 양정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명교 비밀통로에서 접한 유서가 전부였다. 그러나 위일소의 말에 따르면 저 양 좌사가 마음을 다해 따른 이는 무기를 제외하고는 전 교주 양정천이 전부라고 하지 않던가. 오산인 무리도 젊은 시절 양 좌사는 전임 교주 외에는 순순한 낯을 보여주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주전은 양 좌사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교주 앞에서만 양이요 돌아서면 여우라며 토하는 시늉까지 했다. 그러다
양 좌사의 시선 한 번에 괜히 혀를 깨물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기효부를 제하곤 양 좌사가 호감을 보인 유일한 상대이니, 무기로서는 참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회는 무기를 위해 양정천의 생전 모습을 그렸다는 초상화까지 구해다 주었다. 과연 초상화 속 양정천은 반듯하고 어진 군자라 젊은 시절 양 좌사가 마음에 두었을 법도 했다.
그러나 양정천 비슷한 꼴 찾기는 사실 효부 비슷한 꼴 찾기보다 더욱 난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의 기억 속 양정천은 한도 끝도 없이 미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기효부는 무기가 직접 본 적도 있고 대화도 해보아 실체를 알고 있지만, 양정천은 허상 속에서 허상을 찾는 꼴이었다. 처음에는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열어둘 수 있어서 숨통이 트였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양 좌사의 배필감에 대한 기준만 한도 끝도 없이 올리는 결과만 낳았다.
“…양 백부님, 도대체 현실에 있는 사람 중 눈에 드는 이가 있긴 하신 건가요.”
하도 답답해 직접 양 좌사에게 물어볼까 말까, 입술만 수없이 달싹 거린 무기였다. 그러나 차마, 양 백부님 외로워 보여서 제가 외람되지만 동반자 감을 구해 보고 있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사실 양 좌사는 너무도 바쁜 나머지 무기와 그런 이야기를 할 짬도 없었다. 원나라와의 전장이 강남 동서로 더욱 확장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이런 한심한 걱정이나 하고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사실 무기도 양 좌사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적용하느라 바빠 도무지 이런 고민을 길게 하고 있을 짬이 없었다. 보름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불회가 눈치를 주지 않았다면 언제 그런 부탁을 받았냐는 듯 훨훨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회는, 한 번 마음 먹으면 결코 물러나지 않는 불회는, 건곤대나이를 쑥쑥 익혀가는 것만큼이나 결코 자신의 부탁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무기 오빠, 괜찮아. 나는 무기 오빠가 권해만 준다면 원나라 공주라도 새엄마로 받아들일 수 있어.”
불회의 이런 아량에 눈물이 나고 밥맛을 잃어가는 무기였다. 그리하여 이후에는 정말, 인간이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온갖 사람을 다 물망에 올렸다. 명교의 동료들에게는 미안하게도, 뇌문 문주 새극리부터 오산인과 위일소까지 잠깐 목록에 올려둔 적이 있을 정도다. 어째서인지 역시 홀아비로 살고 있는 외숙 은야왕도 후보에 올렸다가, 무당파에서 역시 혼인하지 않은 숙부들 - 특히 이제 막 사지운신을 회복한 셋째 사숙과 현명한 넷째 사숙도 저울질해 보았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무공 여부에 목숨 걸지 말자, 아예 강호인이 아닌 사람에게서 답을 찾자는 생각에 명교 항쟁을 이끄는 선두 주장 주넷째까지 포함 시켰다.
특히 얼마전 교단으로 복귀한 광명우사 범요에게는 기대가 컸다. 우사라잖아! 좌사와 직위도 딱 맞고 나이대도 맞는 우사라고! 비록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지만, 재회했을 때는 양 백부님과 악수도 하고 좋은 형제라고 부르기도 했다니까!
그러나.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세상 어떤 조각을 갖다 맞춰봐도 소용 없는 일이었다. 그 중 누구도 양 좌사와 사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양 좌사도 그들과 일절 엮이는 법이 없었다. 교주의 령을 동원해 단둘이 시찰도 보내보고, 외부 사람 접대도 맡겨 보고, 무기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지만 소득은 그야말로 전무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무기가 이름값을 못하고 너무 많이 거리낀 것이 문제일까. 정말 대승적 차원의 주선, 원나라 공주나 왕야, 아니 원나라 세자하고라도 만남이라도 준비했어야 하는 것일까.
한편으로 허탕 칠수록 불회의 마음도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얽어도 얽어도 미끄러지는 대나무 줄기 같은 양 좌사를 몇 달 째 눈을 부릅뜨고 주시하다보면 저절로 불회가 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양 좌사 혹시 명교 귀신이 될 작정이신가, 혹시 명교와 결혼한 것 아닌가.’
무기는 태어나서 십년 간 한 쌍 정다운 부모만 보았고, 이후에는 그 괴팍한 의선과 독선 부부도 보았다. 세상에는 별의 별 기연이 있고 각양 각색의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양 좌사가 마음 줄만한 이가 그 중 단 한 명도 없는 것일까?
결국 넉달 열흘 째가 되는 오늘, 무기는 다 내려놓고 기효부의 무덤을 찾고야 말았다.
“기 고모님, 죄송합니다. 제가 고모님 께 큰 잘못을 저질렀어요.”
무기가 어린 시절 만든 무덤은 아직도 돌무지가 허물어지지 않았고 비석도 멀쩡했다. 무기는 깊이 절 하고 풀썩 주저앉아 비석을 우러러 보았다.
“불회의 부탁을 받아 양 백부님에게 새 사람을 찾아주려고 백방으로 손을 써보았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헛심만 들였어요. 사실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 있었던 것 같아요.”
호접곡에서 가장 양지 바른 무덤가는 따스하지만 적막했다. 바람도 이 무덤가에서는 잦아들고 한탄도 절로 사그라드는, 그야말로 어떤 영혼이라도 생전 짐을 내려놓고 편안히 잠들만한 곳이었다. 어린 무기가 저도 모르게 묘를 잘 쓴 것일까, 아니면 효부가 잠들었기에 그런 장소가 된 것일까? 어쨌건 무기는 격무와 고민을 내려놓고 간만에 푸념을 늘어놓았다.
“고모님이나 전 교주님이 살아 돌아오시지 않는 한, 절대 무리일 거예요. 세상에 전 교주 외 누가 양 백부님을 복종 시키겠어요. 고모님 외 누구에게 양 백부님이 마음을 쏟겠어요.”
한바탕 쏟아놓고 나니 속이 조금 후련해졌다. 오늘 돌아가면 지금 기 고모님께 말하듯 불회에게도 말할 것이다. 자신이 부족해서 아직 양 백부님의 마음에 들 짝을 찾지 못했다고, 아직은 양 백부님 마음에 들 이를 못 알아보겠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저를 보필해주느라 물심양면 다 쏟고 있는 백부님에게 꼭 보답을 하겠다고 말이다.
그리 마음을 정리하고, 무기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짐을 내려놓으니 하늘이 더 없이 맑아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아니, 구름이 하나 있는 푸른 하늘이, 아니, 구름이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푸른 하늘이….
청익복왕이 날아오는 푸른 하늘에 곧 복왕 특유의 웃음 소리가 메아리쳤다.
“교주! 모시러 왔습니다!”
위일소가 박쥐 날개처럼 펄럭이는 옷 자락을 간수하며 인사를 올렸다. 무기도 마주 인사하며 퍽 놀랐다. 경공에 있어서는 현 무림 최고봉이라 할만한 위일소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잘 들어보니 헐떡인다기보다 숨죽여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어서, 큽, 본거지로 귀환하셔야 겠습니다. 한 시가…. 급합니다. 크큽. 흠. 크흠.”
“무슨 일입니까? 혹여 원병들이 움직이기라도…? 아니면 육대문파가 다시 쳐들어 왔습니까?”
무기의 질문에 위일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헌데, 원병의 승리만큼이나 본교의 위기이긴 합니다. 일종의 내부 우환이지요.”
“내부의 우환이라니요. 교 내의 싸움은 엄금했지 않습니까.”
“그게…. 양 좌사가 차기 교주를 단단히 벌주고 있습니다.”
“네? 양 백부님이 불회를요?!”
불회에게 쓴소리를 하느니 짐독을 마실 양 좌사가, 불회를 벌주고 있다니 이게 무슨 소리일까. 천만 뜻밖의 소식에 무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리는 이미 위일소의 설명을 더 들을 것도 없이 근처에 비끄러매놓은 말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도대체 백부님이 어쩐 일로 불회를 혼내시는 거죠?”
“에 또 그건…. 교주께서 더 잘 아실 텐데요.”
위일소의 설명은 간단했다. 불회의 부탁과 무기의 근간의 노력이 죄다 양 좌사에게 들키고 말았다. 요 몇 달 간 교주가 자꾸 입맛이 줄고, 미간에 고민이 서리고, 무언가 말을 못하고 어물거리기에 양 좌사의 근심도 깊어졌더랬다. 처음엔 교세 확장의 일환이려니 했던 외빈 접대도 많아지는데 무엇보다도 외빈을 보내고 난 후 교주의 낯에 시름이 가득해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챘다고 한다. 결국 오늘 무기가 자리를 비운 사이 불회와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저 철없는 아이의 부탁이라면 모르되 교주께서 친히 차기 교주로 지목해준 불회가 교주를 귀찮게 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 이번에는 엄히 잘못을 따지겠다고 양 좌사가 그 자리에서 불회를 무릎 꿇렸다고 한다. 위일소로서는 차기 교주가 좌사에게 엄한 벌을 받게 되었으니 교주에게 한시라도 빨리 알리는 데 교의 사활이 걸려 있다고 생각했다는 부연 설명이 뒤따랐다. 물론, 표현만 그럴뿐 위일소의 시선에는 호기심과 흥미가 잔뜩 어려 있었지만….
날 때부터 순수하고 사람 잘 믿는 무기는 이번에도 위일소를 한 점 의심도 하지 않은 채 나는 듯 말을 달릴 뿐이었다. 양 백부! 안돼요! 불회 누이는 아무 잘못 없다고요! 아아, 어서 양 백부가 마음 쏟을 짝을 찾아야 할텐데, 불회 누이 기다려! 내가 지금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