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그란 창문의 살 사이로 연한 빛이 들어와 방 안을 비추었다. 한 직공이 거대한 베틀을 크게 놀리는 그 공간에는, 형형색색의 직물들이 저마다 화려한 문양을 뽐내며 이곳저곳 널려 있었다. 베틀이 놓인 단에는 묵빛 직물에 흐드러진 나팔꽃 문양이, 큰 상자에는 위용 있는 봉황과 오색찬란한 구름 문양이 진홍색 직물 위에 사르르 윤기를 빛냈다. 얇은 비단 병풍은 초봄 새잎의 푸릇한 연둣빛이 부드러웠고, 감청색 비단은 새파랗고 진해 가을 하늘의 쪽빛을 한 움큼 베어온 듯 했다.
덜커덩, 차악-!
직물이 늘어진 공간 속 거대한 베틀 위, 오만가지 색을 만들어내는 직공이 손과 발을 재게 놀리자 베틀이 다시 큰 소리를 내었다. 씨실 푸는 북은 유영하는 듯 날실 사이를 날아다니며 음률을 자아냈다.
타악, 착!
면을 짜내는 직공도 그 음률에 심취하여 일련의 동작에 점차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직물이 완성되어갈수록 날실을 두 갈래로 나눈 잉아는 팽팽해졌고, 신끈을 당기는 발은 움직임이 빨라졌다. 무아지경으로 직물을 짜던 그의 행동이 멈춘 건, 이내 직공의 턱 밑에서 두터운 땀방울 하나가 직물 위로 뚝, 떨어졌을 때였다.
“……!”
한참 동안 계속되던 무의식에서 그가 정신을 차렸다. 행하던 동작을 일순간에 멈추고 거친 숨을 내쉬며 오만가지 색으로 혼잡한 공간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놀라며 일순간 베틀에서 손을 떼는 모양새는, 마치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몰라 보였다.
“전하, 서원장께서 오셨습니다.”
영징이 고해 들어온 이는 목소리만큼이나 익숙한 모습을 한 사람이었는데, 계단 밑에 허물없이 앉는 모습과 샐쭉해진 표정으로 자신을 곁눈질하는 모습이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주 익숙한 행동에 익숙한 상황이건만, 계속해서 드는 기시감에 그의 손끝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신을 또 왜 부르셨습니까?”
상대를 바라보지도 않고 퉁명스레 내뱉는 어투가 당연한데도, 그는 친근하게 구는 서원장이 못내 반가웠다.
“보나 마나 또 청명 서원의 일 때문이시겠지요. 그 고약한 위 사업이 그리도 걱정되십니까?”
위 사업, 한 마디에 영혁은 이 모든 기시감과 불안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지난 세월, 형제간에 난무하던 음모와 부황의 매몰참에 대의가 꺾일 생각이 든다면, 자신도 모르게 이곳에 와 항상 베틀에 손을 댔다. 무념무상, 베짱이 왕야 노릇을 하다 보면 잠깐 정말 그리되는 것 같아 무작정 밤을 새워서 면을 짜기도 했더랬다. 그리해 이곳은 초왕부의 직물실이었으며, 저 아래 앉아 툴툴대는 자연 형은 대화가 죽기 전의 신자연이며, 지금 이 순간은 절대 있을 수 없는 현실이기에…….
그리운 꿈이었다.
“청명 사원이 위 사업에게 조정보다 안전한 곳임을 모르십니까? 게다가 천성지 편찬 사업이 얼마나 바쁜지, 아이고오, 전하께선 이 서원장의 허리가 안사람 눈총에 얼마나 굽는지 아셔야 합니다.”
“……본왕은 모두 알고 있소.”
가까스로 짜낸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자연이 계단을 힘들게 짚고 일어나 허리를 매만지며 자신에게 다가왔다.
“설마 봉지미를 서원으로 보낸 일과 그것을 같은 셈 치려고 하시는 것이지요?”
“자연 형. 본왕이 무얼 말인지.”
“대화에게 줄 촉금을 짜준다고 하셨지요! 소신, 두 번은 안 속습니다. 저번에도 그러시더니, 에잉…….”
“봉…지미, 봉지미는, 서원에 잘 있소?”
“이제 막 조정에 출사한 국사무쌍이 서원으로 좌천됐다며 입술이 삼 척은 튀어나왔더이다! 청명 서원을 아주 얕보는 것이지요.”
“아주 잘…, 지내고 있군.”
“허나 금궤요략으로 인해 곧 정세가 급변할 것입니다. 그땐 위지라 하더라도 초연할 수 없겠지요. 황궁의 암투나 제위 다툼은 혈육마저 눈에 뵈지 않는 아귀다툼이니 말입니다.”
지미가 사업으로 승진해 청명 서원을 관리하기 시작할 때쯤, 천성국의 후계로서 황제가 될 이의 이름이 금궤에 담겨 그녀에게 곧 전달될 예정이었다.
“봉지미를 청명서원에 보낸 것. 그녀가 전하와 더 이상 가까워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오, 이 것이 소인의 진의입니다. 이 신자연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한낱 바둑돌이나 돌덩이도 아무 데나 던져버릴 수 있지요.”
“그 또한 본왕이 잘 알고 있소. 본왕의 책사는 항시 본왕의 말을 듣지 않았지.”
“하지만 초왕 전하… 영혁. 지금은…, 지금은 막지 않겠습니다.”
어느 순간 신자연이 다가와 가슴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제야 영혁은 자신이 손을 꽉 쥔 채로 가슴 위에 두었음을 알았다. 평소 하던 버릇이라 별다른 것 없는 행동이었지만, 자연은 그 누구보다 영혁의 마음을 안다는 듯 주먹 쥔 손을 찬찬히 펴 주었다. 자연의 손이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벌벌 떠는 그의 손을 쓰다듬을 때, 영혁은 오로지 한 생각만 했다.
“… 전하께서 작금, 이미 허상임을 아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들고양이에게 가시지요.”
너의 온기를 느낄 수 있겠구나.
“어서 가십시오.”
영혁은 자신이 어떻게 걷는지 체감할 수 없었지만, 무작정 베틀을 박차고 나와 계단 밑으로 몸을 던졌다. 정신없이 직물들을 들추고 헤쳐나가며, 오직 청명 사원으로 향한다는 일념 하에 발을 움직였다. 어느 방향에 서원이 있는지 모르지만 제발 이 간절한 허상이 순식간에 끝나버리질 않기를, 내가 너와 닿기 전에 끝나지 않는 고통과 괴로움에 다시 가라앉지 않기를, 속으로 수백 수천 번을 빌고 또 빌며 내달렸다.
“초왕 전하…?”
그리고 마침내 그녀였다.
“전하, 어찌 이리 식은땀을 흘리시는지요?”
순간 정신이 혼미해져 정신을 차리니 또 어느 곳에 닿아있었다. 푸른 녹음을 가득 실은 바람이 나무 창틀을 넘고 들어와 방안을 적시자, 그제야 영혁은 또 다른 공간을 알아챘다.
쏴아아-.
나뭇가지 스치는 바람소리에 정신이 맑아지고, 흰옷을 입고 재잘거리는 서원생들이 한 쪽에서 주령구를 던지며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새까만 나무로 이루어진 책장, 탁자, 그리고 각종 문방사우가 정갈히 놓여있는 방은, 영혁 그가 하염없이 기다렸던 이가 주인인 곳이었다.
탁, 검은 바둑돌 하나가 판 위에 놓이자 그는 소리를 따라 옆을 돌아보았다.
“바둑 두시다가 혼절하신 겁니까? 왜 그러세요, 바둑 두자 하신 건 전하십니다.”
“……일전에, 그러니까, 전, 에 말이다……. 요 상 앞에서 서원생들과 도박을 하다 걸렸다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꺼냈다는 말이, 그날과 같은 장난스런 어투였다.
“소문을 덜 들으신 게 분명하군요. 작은 도박판에도 세상의 이치가 담긴 법입니다. 전하께서는 도박으로 치윤법을 설명하여 윤달을 예측하실 수 있으신지요? 소인은 할 수 있습니다.”
생긋, 자랑하는 이의 미소가 눈물이 날 정도로 귀했다.
“……그래, 부황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위 사업이니 어련하겠느냐.”
벅찬 마음을 숨긴 채로 바둑판 위에 흰 바둑돌을 다급히 올려놓자, 예상치 못한 수였는지 그녀가 입술을 살짝 물고는 바둑판에 몸을 기울였다. 판세를 읽을 겨를조차 없어 아무 곳이나 올려놓은 수에 그녀가 꽤 고심하며 한숨을 푹, 쉬자 끝내 그 온기가 고달파 거친 손이 불쑥 나아갔다.
“저, 전하…….?”
타다닥….
다급한 움직임에 바둑돌들이 모두 흩어져 판의 형세가 뒤틀려 이지러졌다.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표정이 꽤나 놀라 보였지만, 지금 그에겐 놀란 그녀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영혁?”
“황가에서 정과 온기는 사치지. 그리하여 황족들은 타인의 온기를 이리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가 올라오는 흐느낌을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입매를 얄궂게 늘어뜨렸다. 한 번 꽉, 감다 뜬 그의 눈 안에는 당황해하며 물러서려는 그녀의 모습이 가득 찼다. 간신히 떨리는 손을 다시 거두고 뒤로 물러나는 영혁의 반대 손은, 바둑판 모서리를 세게 잡다 못해 피가 통하지 않아 새하얬다. 그를 의아하게 보던 지미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이내 씩, 웃기 시작했다.
“전하, 이러셔도 소인은 금궤를 내어드릴 수 없습니다.”
“넌……. 아직 금궤가 없다. 오늘은 네가 청명 서원에 온 지 사흘도 채 지나지 않은 날이니까.”
꿈임을 확신하는 영혁의 말에, 지미가 웃던 입매를 잠시 어색하게 놀리더니 이내 회상을 읊었다.
“영혁,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하지 마라. 그냥 날 이리 계속 봐주거라. 이리 손을 잡고, 그냥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라.”
“전에 내가 그랬었죠. 당신의 마음에도 밝게 빛나는 부분이 있더라고 했었잖아요.”
“그만, 그만 말하거라. 그냥 이렇게….”
“제 귀인 말고 악인으로 천년을 살라고도 했었지만, 영혁. 당신은 선인이에요. 알고 있나요?”
“아니, 모른다. 본왕은 절대 모른다. 아무도 본왕 곁에 남아 있지를 않아. 어머니도, 자연 형도….”
“악은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제가 항상 어겼던 말이지만, 나중에서야 그 진의를 알았습니다.”
“봉지미.”
거리낌 없이 허상임을 드러내는 지미의 말에 영혁이 다급하게 바둑판을 치우고 땅을 무릎으로 기었다. 앉아있는 그녀의 관복에 얼굴을 파뭍다가, 얼굴 한번이 간절하고 절박하여 다시 떨리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럼에도 당신과 함께할 수 없었던 건, 지난 세월 무수히 쌓인 생명의 무게 때문이었겠지요.”
“다 안다. 본왕이 다 알아.”
“자책하지 마세요. 당신과 나의 옳음에 궤도가 달랐을 뿐이니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지미가 하염없이 그녀 얼굴을 매만지는 두 손을 끌어다가 더 깊숙이 얼굴을 파묻었다. 한순간 한순간 너무나 귀중하여 우는지도 모른 채 눈물을 뚝뚝 흘리는 영혁이 이마를 맞대오자, 지미는 온기를 나누며 콧대를 마주했다.
“그 외로운 자리에서 잘하고 계십니다. 아주 잘하고 있어요. 제가 전에 말씀드렸죠? 저 같은 평민 출신 관리는 정세가 안정되고 태평성대가 계속돼야 돈을 벌고 목숨을 보전한다니까요?”
실없는 격려에 두 사람의 입가가 힘 빠진 미소를 자아냈다. 코를 맞대고, 부드러운 볼을 두 손 가득 만지며, 세상에 둘밖에 없다는 듯이 온기를 나누고 볼을 마주했다.
“영혁, 내세에는 우리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요.”
“그리된다면, 난 하늘 끝까지 쫓아가 널 찾아내마.”
“我喜欢你。당신을 사랑해요.”
전엔 영혁이 먼저였지만, 이번엔 지미가 먼저였다.
“지금도 입 밖으로 내기 두려운가요?”
그럴 리가. 이에 영혁이 깊게 웃으며 답했다.
“我也是。나도 사랑한다.”
지독히 그립고 아름다운 꿈이었다.